peace builder와 5가지 플랫폼

저는 매일 아침 컴퓨터 앞에 앉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우선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1년 뿐이라고 가정합니다. 그리고 내가 되고 싶은 정체성을 적어 놓은 버킷리스트를 열고, 한번 더 내가 되고 싶은 정체성에 더 가까워지도록 다듬고, 내가 가진 자원과 역량, 시간의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만큼만 담기도록 다듬습니다.

이 목록에는 일치되고 정직한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몸과 마음의 건강. 가족과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 알고 싶고 익히고 싶은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으로 내게 삶을 준 이 세상 속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일들을 할지가 담겨 있습니다.

오랜 기간동안 다듬어온 이 목록에 2017년 지금 이 시점엔 peace builder란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평화빌더입니다. 스스로의 평화로부터 가까운 사람들과의 평화, 그리고 세상과의 평화를 더 많은 사람들이 누리게 되길 바라고, 그럼으로써 세상이 더 평화로운 곳이 되도록 기여하는 것이 저의 욕심입니다. 그 일에 빌더라는 정체성으로 도전하려고 합니다.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조직하고 서비스와 플랫폼을 만들어내어 적절한 자리에 세우고 지속 가능하도록 붓돋는 작업. 지금은 인터넷과 IT라는 기술을 주로 활용하지만, 더 많은 것들을 배워서 세상을 더 평화롭게 만드는데 활용하고 싶어 합니다. 대문자가 아닌 소문자인 이유는 수많은 피스빌더 중의 나도 한명이란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평화가 가득하도록 제가 구체적으로 하고 싶다고 정리한 세부항목은 5가지 플랫폼입니다. 전문가들을 위한 삶의 기반, 미디어, 컬렉티브, 민주주의, 그리고 다시 삶입니다. 그리고 이 각각은 현재 제가 진행하고 있는 일들, 혹은 앞으로 하려는 일들과 연결됩니다. 슬로워크, 빠띠, 우주당, 라이프퀘스트 등입니다.

가장 첫번째가 전문가들을 위한 삶의 기반입니다. UFOfactory였고, 지금은 슬로워크입니다. 사회의 혁신이든, 소셜 임팩트든,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든, 더 재밌게 만들든 모두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 일들이 지속되려면 가장 먼저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의 삶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금수저가 아닌 저에게도 이 기반은 필요합니다. 라이트 형제가 자전거 가게를 운영하면서 비행기를 만들었지요. 슬로워크의 미션은 사실 이보다는 더 포괄적입니다만,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의 삶의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기본 소득 논의에서 이슈가 되는 어느 정도가 삶의 기반으로 적절한가에 대해서도 각자 팀이 자율적으로 정의하면 목표가 정해지는 구조입니다. 평화의 여정에 이 자립의 과정은 가장 기본이 됩니다. ( 한가지 더 기대하는 바가 있지만 그건 다음 기회에 풀어 보겠습니다 )

두번째는 미디어입니다. 특히 주목하는 것은 개인 미디어입니다. Me이면서 Media입니다. 슬로워크가 하는 일들 중 상당수가 브랜드를 만들고 홍보물과 웹사이트를 만드는 일입니다. 이 일이 가지는 의미를 저는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세상에 목소리를 내는 수단을 갖게 하는 것으로 봅니다. 서로 존중하기 위해선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서로 이해하려면 서로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 나에 대해 알기 위해선 나를 알릴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합니다.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이 수단이 모두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힘을 모두가 가질 수 있도록 만드는게 하고 싶은 일 중에 하나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다음 블로거뉴스와 다음뷰를 만들때에도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세번째는 컬렉티브입니다. 커뮤니티라는 말이 더 익숙합니다만, 굳이 컬렉티브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까닭은 앞서 언급한 자립과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양을 설명하는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목소리가 만나서 부딪히고 새로운 답을 만들어내고, 적절한 도움을 서로 주고 받는 곳. 우리가 일하는 조직,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과의 모임,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더 민주적인 관계를 맺도록 돕는 기반 플랫폼과 가이드를 빠띠를 통해서 만들고 있습니다.

네번째는 정치입니다. 정치를 통해서 우리가 바꾸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규정하고 있는 여러 시스템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방식입니다. 그 시스템은 법률이기도 하고, 행정이기도 합니다. 이 시스템들이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작동하도록 만들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직접 참여해서 개선할 수 있도록 프로세스를 만드는게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예전과 달리 지금 시대에는 인터넷의 힘을 활용해 시민들이 더 직접 더 자주 우리 사회의 시스템의 개선 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주당으로 이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다섯번째는 다시 삶입니다. 메이커들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생존의 수단으로써의 일뿐만 아니라, 자신다움을 표현하고 세상에 기여하는 수단으로서의 일을 하는 기회(덕업일치)를 갖는 것. 더 나아가 노동하지 않고 놀 권리를 갖게 되는 것. 이를 돕기 위해 기술을 활용해 플랫폼을 만든다면 어떤 서비스가 될까요? 롤플레잉 게임에서 캐릭터를 성장시키듯이 우리가 이 세상을 도전과 모험으로 바라보고 자신을 성장시키는 인생 게임을 만들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앞의 네가지를 마무리하고 어서 도전해 보고 싶은 과제입니다.

저에게는 이 다섯가지가 한 사람이 평화에 도달하는 과정이자 세상이 평화로워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기반을 통해 자립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 낼 수단을 갖게 되고, 서로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협업하고, 세상을 이루는 시스템들을 정치 참여를 통해 변화시키고, 그 환경 속에서 다시 각자의 개성에 맞는 삶을 즐기는 것. 이런 삶이 평화로운 삶이고, 이런 세상이 저에겐 평화로운 세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이 일을 잘 할 수 있을까요? 글쎄 그건 좀 다른 문제인 것 같습니다만, 하고 싶은 일이 할 수 있는 일보다 더 중요한 저이기에 19년째 여러 가지 일을 하며 꾸역 꾸역 도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아마 그럴 것 같아요.

밴드하듯이 새로운 일하기

맨 땅에 헤딩하거나, 장님 문고리 잡듯이라도 일을 시작하는 편이 낫다는 이야기들이 많다. 마음껏 실패하더라도 그 경험이 훗날에 도움이 될테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답도 찾을 수 있을 꺼란 이야기다. 그러나 보통은 그렇게까지 맨땅에 헤딩하거나, 완전히 눈을 감은채 일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는게 바람직하지도 않고.

일단 그런 방식에는 절반 이상의 실패 확률에 따르는 비용이 든다. 시간과 현금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몸과 마음에 고통도 따른다. 그리고 맨 땅에 헤딩이나 장님 문고리 잡기는 좋은 표현이지만 실제로는 동전 던지기랑 다르지 않다. 요리를 배우겠다고 냄비를 불 위에 던져서 놓으며 바람직하게 놓는 방법을 찾아가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 하는 일일 경우에 대체로 자신이 예전에 했던 경험 중에서 성과가 좋았던 것들을 찾아 보고 우선 적용해 본다. 나는 UFOfactory를 시작할때 “회사를 만들어 본 경험”은 없지만 웹서비스를 만들던 경험을 참고했다. 고객과 직원들의 만족도를 UX라고 생각했고, 어떤 인풋과 아웃풋이 어떤 알고리즘을 거쳐서 나오는게 맞을지 고민했으며, 실제로 회사가 돌아가는데 필요한 핵심기능이 몇 안 될 꺼라는 생각을 하며 그걸 찾아내기 위해 작은 실험들을 하며 추려내기도 했다.

중요한건 지금인데, 내년에 새로운 일을 하게 될지 말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이 새로운 일에 대해서 아는게 하나도 없는지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감도 못 잡는 상황이었다. 멤버들의 생계가 달려 있어서 고민을 미룰 수도 없었다. 그러다 어제 청년허브에서 준비한 국제컨퍼런스에 토론자로 참여하면서 하나의 힌트를 얻었는데 그것은 바로 ‘밴드’였다.

서로 다른 악기를 다루는 연주자들이 모여서 합주를 한다. 합주 안에서 각자의 재능과 감성에 따라 변주가 일어나고, 그 음악이 듣는 이들에게 감동을 준다. 5분에서 10분 정도의 곡을 연주하는 동안 동료들과 함께 각자의 악기로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꽤나 경이롭다. 누가 들어가고 누가 빠질지, 누군가의 악기가 리드하는 동안 내 악기로 어떻게 서포트할지, 치고 빠지고 함께 달리고, 순간순간 눈을 마주치며 신호를 주고 받기도 하고, 동료의 예상치 못한 애드립에 감탄하고 내가 펼친 연주에 동료들이 눈짓으로 환호하는 등. 또한 그 음악을 듣는 이들의 마음이 열리고 각양각색의 마음들이 공간 속에 뒤엉키며 함께 공유하는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경험은 음악이 아니면 경험하기 힘든 순간이다.

앞으로의 조직들은 이런 밴드의 합주 같은 방식으로 운영하는 바람직한게 아닐까? 그리고 나도 새로 시작하게 될지도 모를 일을 합주 방식으로 해 보면 되지 않을까? 전문가들을 모으고 그들과 함께 합주하듯이 일을 이어나가는 방식. 이미 15년도 전에 한 경험임에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그 순간들처럼 해 보면 되지 않을까? 이렇게라면 어쩌면 ‘시도는 해 볼 수 있겠다’단 생각이 들었다.

마이너하다

고백하자면.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될때 광장에 있었다, “정략적인 탄핵을 그만 하라”는 메시지를 담은 민주노동당 전단지를 나눠 주며. 2002년 월드컵이 한참일때의 나는 미선이, 효순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하고 있었고. 노무현 대통령이 이라크에 파병하는 것을 반대하며 광장에 나갔고, 노동자들이 분신을 이어나가도록 압박하는데 대해 분노하는 입장이었다. 첫 국제선 비행기를 타 본 건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이 민간인을 학살한 지역에 가서 사죄하러 갔었을 때였고. 그 후로도 정당은 계속해서 진보정당을 지지하지만 몇걸음 더 나가 해적당 같은 정당이 나오길 기대한다. 몇년 전엔 비영리단체나 소셜벤처들이 성장하는데 필요한 IT 인프라 같은 조직을 만들겠다며 UFOfactory를 만들었고 솔직히 몇년간 무리한 일을 맡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욕도 많이 먹었다. 번 돈도 없는데 돈만 벌지 말고 이제 사회공헌도 좀 하라는 조언도 여러 차례 들었다.

그래도 지난 1년간은 도움을 받아 여유를 누리며 빠흐띠를 통해 일상의 민주주의, 한국의 커뮤니티 문화와 공론장, 정부와 시민이 만나는 영역까지 고민하며 여러가지 플랫폼과 캠페인을 꽤나 많이 만들었다. 인원과 자원에 비해서는 노력을 많이 했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여러 사람에 눈에 띄지도 못했고, 커다란 임팩트도 없었다고 자임한다.

이러고 사는, 그리고 이 정도만큼의 결과밖에 못내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다수의 감수성이 없어서이기 때문일테다. 지난 글에서도 적었지만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다 개발까지 했으니 나는 마이너 중의 마이너이다. 다수가 공감하는 지금 가장 중요한 이슈가 뭔지 파악하는 능력이 내게는 없음 정도를 나는 정확하게 안다. ( 이 외에도 괜한 책임감에 일을 너무 벌이기도 하고, 절대적인 역량도 전반적으로 부족했다. )

어쨌든 나는 이런 자신을 인정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앞으로 하려는 나의 상상력을 넘어가는 일은 이 영역에서 하게 될테다. 그게 소박하고 영양가가 계속 없더라도, 다수가 말이 안 된다고 말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하게 될 테다. 마음가는대로 하면 그렇게 되니까. 그동안 이런 무감각, 무능력, 마이너함을 감추려 한게 내 잘못인 것 같다. 이 시국에 이런 글이라니 이것만 봐도. 헙헙.

자축 겸 망상

오늘은 12월 5일. 나의 양력 생일이다. 보통은 음력 생일을 기억하는 수준에서 지나가지만, 올해는 양력 생일이 남다른 느낌이었다. 1976년 12월 5일에 태어났으니, 지금 2016년 12월 5일까지 나는 정확하게 40년하고 하루를 맞았다.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수많은 후회들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잘 구분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보통은 시도하지 않을 일들을 시도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상황에 떠밀려서 결정하고, 능력이나 여건이 받춰주지 않을 때에도 내가 좀 고생하지 뭐 라고 생각하면서 시도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사서 고생하면서도, 별로 성과없는 일들을, 눈치없이 많이 한 것 같다. 솔직히 안 그랬으면 좋았을텐데 싶은 마음은 크지만, 별 다른 수도 없었을게 틀림없다.

꽤나 긴 시간을 지내고 난 지금 한편으론 만족스럽기도 하다. 하고 싶었던 것들을 했고,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들을 했으니까. 내가 정리한 나의 버킷 리스트 3/5 정도가 일정 부분 마무리되었다. 커다란 성공을 거두진 못했어도, 여러 우여곡절들을 버텨내며, 지금 이렇게 살아 있구나 싶어 며칠 전엔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러나, 그래도) 이제부터는 내 원래 생각에 가까운 일을, 직접적으로 해야겠단 다짐을 했다. 앞으로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니, 지금까지처럼 “누군가를 돕고 시너지를 낸다”는 스탠스에만 머물러 있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걸 무엇으로 잡을지 원점에서부터 다시 내 안을 검색해 보고 있다. 내 상상을 뛰어 넘는 일이 잡히기를 바라며.

ps. 이런 모색의 계기가 된 “이제부터 10년 뒤에 뭘 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으냐”고 질문을 해 주신 분께 여기에 감사 인사를 남긴다.

척박함 속에서 더디게 자라는 이들

적지 않은 햇수를 살아왔지만 나는 늘 부족함을 느낀다. 어떻게 행동하는게 좋은지, 내 느낌과 생각은 내 것이 맞는지 하루에도 수십번씩 고민한다. 그런 고민을 통해 새롭게 얻은 깨달음은 눈에 잘 띄는 메모장에 적어두고 자주 들여다보려고 노력도 한다. 자신을 늘 튜닝하는 느낌, 그러나 앞으로도 부닥치게 될 일들이 무수하게 많다는 걸 알기에 막막한 느낌.

부닥쳤구나는 대개 불편함이 느껴질 때 알아차린다. 그렇다, 아직 나는 일상에서 만나는 여러가지 상황들이 불편하고 어렵다. 더 정확한 느낌은 “나라는 사람이 불편하고 어려워 한다는 걸 알겠다”이다. 다행히도 “나를 비난”하거나 “상대를 비난”하거나 “상황을 비난”하기보다는,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상황에 부닥쳤구나”라고 생각할 요령은 갖추었다. 그리고 고민을 시작하고 내 답을 찾으려 장님 문고리 잡듯이 노력한다. 그 노력은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까이게 하고 다치게 하고 무언가가 망가지게 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니까. 그리고 이렇게 된 데에는 두가지 이유 정도가 있는 것 같다.

첫째로 나 자신이 자라는 속도가 평균에 비해 좀 느린 편이었다. 나는 아직도 어릴 적 나와 지금의 내가 크게 달라진게 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도 고등학교를 절반이나 다닌 이후에야 보통 이야기하는 사춘기 같은게 찾아왔던 것 같다. 기억 보정이라 정확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때 즈음에야 내가 아닌 주변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릴 적엔 늘 몸이 허약한 아이였고 그게 정말로 싫었다. 몸이 자라는 것도 정신이 자라는 것도 평균보다는 느리다는걸 아주 어릴 적부터 느낄 수 있었다.

두번째로 우리집은 넉넉하지가 않았다. 그렇기에 “어떤 상황을 겪어 보거나, 그 상황 속에서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에 대한 참고할 만한 꺼리가 부족했다. 부모님들도 충분히 많이 아셨던 것 같지는 않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고등학교를 나왔다는게 자랑스러운 환경이었고, 부산의 가까운 친척들 중에는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없었다. 꽤나 공부를 잘 했던 편이었지만, 나는 전액장학금과 기숙사로 운영되는 부산의 모 공업고등학교에 가서 빨리 독립하고 싶었고 그 선택지가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대학에 가서야 과학고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고, 직접 만나는 것도 처음이었다. 나나 내 주변이 아는 선택지란게 그 정도 범위였다. 외국대학에 다니는 아이들도 대학 졸업 즈음에나 실제로 본 것 같다. 서울을 가 본게 20대 중반까지 두번 정도였을 뿐이었으니까. 그것도 친구랑 함께 “한번 가보자”라고 해서 여행처럼 가보거나, “시험”을 치르러 고속버스에 실려 간 것이었다. 나는 부산의 가난한 산동네라는 척박한 환경 안에 있었던 셈이다. 친구들 중에서 그나마 잘 사는 아이들은 부모님이 작은 가게를 하는 집이었고,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에서 잘 사는 동네 아이들이었던 아파트 촌에 사는 아이들도 지금 기준으로 보면 30평을 넘는 집을 본 기억이 없었지만 그 아이들은 그 아이들만의 세계가 있었다. 대학교가 가까웠던 동네였던지라 우리는 매일같이 최루탄을 마셨지만, 어릴 적 우리에게 왜 대학생들이 거리에 나와서 저러는지 설명해주는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여러가지가 낯설고 어렵다. 때론 정말 쉽지 않다고 느낀다. 내가 자라온 척박한 환경이나 더딘 스스로가 불공평하다고 느낄 때도 많다. 그게 내게 주어진 조건이고 자원이겠지만, ‘누구누구를 만나봐라’라고 주선해주는 외할아버지나 친척 어르신, 친한 선배는 커녕 “이제서야 말하는데 말이지”라며 인생 상담을 해 줄 부모님도 30대가 된 이후의 내겐 없었으니까. 그러나 어디 나만 그렇겠나 정도는 아는 나이가 되어서 다행이고, 내가 예측에서 벗어난 행동을 해서 깜짝 놀랐던 이가 있었다면 이런 사정이 있었구나라며 이해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주말 보내기 – 완전한 이주 준비

숙소에 있는 짐을 하나 하나 정리했다. 사무실에 가져갈 책, 일본으로 가져갈 책, 당분간 읽을 책을 한 곳으로 모으고. 옷가지는 눈에 보이는 곳에 모은 후에 가능한 필요한 것만 남겨두려고 해 본다. 먹을꺼리들은 여간해서는 잘 안 먹으니까 사무실로 옮겨놓았고, 몇 안 되는 식기도 한 곳에 모아둔다. 눈에 보이는게 내 짐의 전부이지만 이것들 중에도 쓰이지 않는게 많다. 생활하는데 내게 필요한건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

지금 지내는 곳의 계약이 이제 몇 달 남지 않았다. 계약이 만료되면 가급적 한국에 오는 횟수를 더 많이 줄이려 한다. 경제적으로 넉넉치 않은 상황에서 삶의 기반을 이렇게 국외로 옮겨도 되는걸까 걱정이 든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하는 일이 넉넉해지려는 일과는 무관하긴 매한가지다. 애초에 넉넉함이란게 무엇인지 경험해 본 적도 없던터라, 노력도 안 하면서 혹시나 기회가 올까라는 막연한 바램이 있는지도 모른다. 정말 바라는게 아니라.

부모님 두 분이 모두 돌아가신 후에 알게된 것도 두 분의 삶 어떤 순간에도 넉넉한 적이 없었다는 발견이었다.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에겐 받아야 할 빚들이 있었지만 갚아야 할 것들도 있었기에 우리 형제는 상속을 포기하기로 했고, 어머니는 형과 함께 사는 것과 매달 나오는 적은 보조금 외에는 저금도 벌이도 없었다. ‘매달 생활비를 어떻게 만드셨던 걸까’ 나는 두 분이 돌아가신 후에야 그런 의문이 들었고, 아무 것도 못 해드렸던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내가 첫 직장을 다니기 위해 부산을 떠날때, 부모님이 주신 500만원이란 보증금과 지인들로부터 빌리신 돈을 갚기 위해 내가 살던 곳의 보증금을 빼는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첫 직장을 다니면서는 얼마 안 되는 비용이었지만, 은행으로부터 빌린 학자금을 갚고 있었고.

물론 나 역시도 넉넉하다는 느낌, 안정감을 가져본 적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직 한 번도 없다. 그러니 20대의 내가 부모님의 사정을 더 자세히 알았다한들 무얼 할 수 있었겠나.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은 이렇듯 목만 내어놓고 먼 곳을 수영하는 느낌 아니겠나 짐작하며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버텨낼 각오였을 뿐이다. 어쩌면 내가 만드는 조직의 구성원들의 먹고사니즘을 가장 먼저 걱정하는 까닭도 내가 해 온 경험과 내가 처한 상황 때문일 테고. 부산의 가난한 산동네 아이였던 내가 기술 하나로 버텨온 것처럼 그들이 기술로 밥벌이를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제 앞가림도 여전히 못하면서 말이다.

빠흐띠 : 세개의 플랫폼

지금 작업중인 나의 크롬 탭을 보니 빠띠, 가브크래프트, 카누 3개가 있었다. 1년간 이런저런 여러가지 실험을 하며 빠흐띠 팀이 모은 세가지 조각이다. 사람과 사람을 단순히 연결하는 것을 넘어, 어떻게 상호 존중과 시너지를 일으키는 관계를 맺게 할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이다. 그럼으로써 내가 사는 세상에 더 나은 더 많은 민주주의를 퍼트릴지에 대한 빠흐띠 팀이 내놓는 답안지다.

chrome-tab

슬로워크, UFOfactory 합병도 어느 정도 자리 잡아가는 시점이고. 빠흐띠도 1년간의 실험을 정리하고 이제 본격적인 프로덕트 개발, 본격적인 마케팅, 본격적인 컨텐츠 및 커뮤니티 발굴을 해야 하는 시점이다. 기능의 강약도 없고, 컨텐츠 발굴도 없이 빠흐띠 팀은 개발자들만 모여 실험해 보고 싶은 건 다 해 본 한 해였다. 카누는 두번 만들어봤고 (앱까지 치면 3번인가?), 빠띠는 우리가 아는 모든 서비스를 다 흉내내 보았고, 가브크래프트는 나는 알아야겠당, 국회톡톡 등으로 여러가지 접근을 실험해 보았다.

아직도 난 민주주의 플랫폼을 기획하고 개발할때 두근거린다. 이 두근거림만으론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순 없겠지만,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의 네트워크에 끼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하나씩 해 나가고, 그 네트워크가 함께 세상을 바꾸면 좋겠다. 오늘도 앞으로도. 그렇게 계속 살고 싶다. 그게 내 사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