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함 속에서 더디게 자라는 이들

적지 않은 햇수를 살아왔지만 나는 늘 부족함을 느낀다. 어떻게 행동하는게 좋은지, 내 느낌과 생각은 내 것이 맞는지 하루에도 수십번씩 고민한다. 그런 고민을 통해 새롭게 얻은 깨달음은 눈에 잘 띄는 메모장에 적어두고 자주 들여다보려고 노력도 한다. 자신을 늘 튜닝하는 느낌, 그러나 앞으로도 부닥치게 될 일들이 무수하게 많다는 걸 알기에 막막한 느낌.

부닥쳤구나는 대개 불편함이 느껴질 때 알아차린다. 그렇다, 아직 나는 일상에서 만나는 여러가지 상황들이 불편하고 어렵다. 더 정확한 느낌은 “나라는 사람이 불편하고 어려워 한다는 걸 알겠다”이다. 다행히도 “나를 비난”하거나 “상대를 비난”하거나 “상황을 비난”하기보다는,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상황에 부닥쳤구나”라고 생각할 요령은 갖추었다. 그리고 고민을 시작하고 내 답을 찾으려 장님 문고리 잡듯이 노력한다. 그 노력은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까이게 하고 다치게 하고 무언가가 망가지게 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니까. 그리고 이렇게 된 데에는 두가지 이유 정도가 있는 것 같다.

첫째로 나 자신이 자라는 속도가 평균에 비해 좀 느린 편이었다. 나는 아직도 어릴 적 나와 지금의 내가 크게 달라진게 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도 고등학교를 절반이나 다닌 이후에야 보통 이야기하는 사춘기 같은게 찾아왔던 것 같다. 기억 보정이라 정확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때 즈음에야 내가 아닌 주변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릴 적엔 늘 몸이 허약한 아이였고 그게 정말로 싫었다. 몸이 자라는 것도 정신이 자라는 것도 평균보다는 느리다는걸 아주 어릴 적부터 느낄 수 있었다.

두번째로 우리집은 넉넉하지가 않았다. 그렇기에 “어떤 상황을 겪어 보거나, 그 상황 속에서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에 대한 참고할 만한 꺼리가 부족했다. 부모님들도 충분히 많이 아셨던 것 같지는 않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고등학교를 나왔다는게 자랑스러운 환경이었고, 부산의 가까운 친척들 중에는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없었다. 꽤나 공부를 잘 했던 편이었지만, 나는 전액장학금과 기숙사로 운영되는 부산의 모 공업고등학교에 가서 빨리 독립하고 싶었고 그 선택지가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대학에 가서야 과학고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고, 직접 만나는 것도 처음이었다. 나나 내 주변이 아는 선택지란게 그 정도 범위였다. 외국대학에 다니는 아이들도 대학 졸업 즈음에나 실제로 본 것 같다. 서울을 가 본게 20대 중반까지 두번 정도였을 뿐이었으니까. 그것도 친구랑 함께 “한번 가보자”라고 해서 여행처럼 가보거나, “시험”을 치르러 고속버스에 실려 간 것이었다. 나는 부산의 가난한 산동네라는 척박한 환경 안에 있었던 셈이다. 친구들 중에서 그나마 잘 사는 아이들은 부모님이 작은 가게를 하는 집이었고,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에서 잘 사는 동네 아이들이었던 아파트 촌에 사는 아이들도 지금 기준으로 보면 30평을 넘는 집을 본 기억이 없었지만 그 아이들은 그 아이들만의 세계가 있었다. 대학교가 가까웠던 동네였던지라 우리는 매일같이 최루탄을 마셨지만, 어릴 적 우리에게 왜 대학생들이 거리에 나와서 저러는지 설명해주는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여러가지가 낯설고 어렵다. 때론 정말 쉽지 않다고 느낀다. 내가 자라온 척박한 환경이나 더딘 스스로가 불공평하다고 느낄 때도 많다. 그게 내게 주어진 조건이고 자원이겠지만, ‘누구누구를 만나봐라’라고 주선해주는 외할아버지나 친척 어르신, 친한 선배는 커녕 “이제서야 말하는데 말이지”라며 인생 상담을 해 줄 부모님도 30대가 된 이후의 내겐 없었으니까. 그러나 어디 나만 그렇겠나 정도는 아는 나이가 되어서 다행이고, 내가 예측에서 벗어난 행동을 해서 깜짝 놀랐던 이가 있었다면 이런 사정이 있었구나라며 이해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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